나치의 독일 내 최초 수용소, 다카우 강제 수용소 – 20만 명의 아픔이 고스란히 –
<소개>
다카우 강제 수용소 Konzentrationslager (KZ) Dachau 는 어쩌면 ‘문화유산‘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들이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조금 거리가 먼 곳일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독일에도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 성의 모티프가 된 노이슈반슈타인 성 Schloss Neuschwanstein, 베를린 장벽의 상징적인 문이기도 했던 브란덴부르크 개선문 Brandenburger Tor 을 비롯한 여러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많다. 독일의 많은 명소, 문화유산에 직접 가보기도 하였고 평소 관심도 많은 나에게 한 곳을 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미지 스케치북 리포터‘로서 내가 청소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였다.
다카우 강제 수용소는 우리의 보편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의 아름다운 곳은 아니다. 하지만 잊으면 안 되는 슬픈 역사의 현장이며 우리의 역사와도 비슷한 점이 있는 곳이다. 정치범 수용을 위한 최초의 공식 강제 수용소로서 수감자가 20만 명이 넘었고 보조 수용소까지 합하여 3만5천명 이상이 희생된 이 곳은 현재도 1933년에 개설됐을 때의 형태와 구조를 보존하고 있다. 인적이 드문 외딴 곳에 덩그러니 위치하고 있는 수용소에 도착하면 커다란 공원 안에 있는 박물관 같은 느낌이 – 실제로 수용소 안팎에 박물관이 있다 – 들기도 하는데, 독일이 세계2차대전의 전범국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점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는 크다. 마치 지금 일본에 서대문 형무소와 같은 곳이 – 정확한 역사적 사실과 함께 – 보존되어 전시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에 조금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홀로코스트의 주범이었고 전쟁의 책임이 있는 독일 현지에 위치한 많은 유대인 박물관과 강제 수용소들은 역사를 숨기거나 왜곡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받아드리며 더 나아가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현재 독일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배경>
독일 남부 바이에른 Bayern 주 뮌헨 München 에서 북서쪽으로 약 16킬로미터 떨어진 다카우 Dachau 라는 작은 마을에 위치한 다카우 강제 수용소는 1933년 3월 22일에 문을 열었다. 지어질 당시의 수용인원은 최대 5,000명이었는데 – 1938년 8월에 완공된 증축공사로 수용인원이 후에는 6천명으로 늘긴 했다. – 이 수는 종국에 200,000명이 넘게 수용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용자들이 말도 안되게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5년,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 인종차별을 제도화한 뉘른베르크 법이 발의된 이후에 여호와의 증인, 동성애자, 이민자들이 대거 붙잡혀 오면서 수용자들은 본격적으로 급증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는 수용가능인원의 2배에 가까운 11,000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이곳에 수감되었다.
흔히, 나치의 강제수용소를 떠올리면 유대인 수감자들을 생각하는데 강제수용소는 본래 유대인 수용소가 아니다. 처음에는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 유대인을 포함한 – 정치범을 수감할 목적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본질이 퇴색되었고 독일에 사는 부유한 유대인들이 그 표적이 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독일을 떠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재산을 히틀러 정권에 헌납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수용소에 수감되어야 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점령한 후에는 그곳에 사는 유대인들도 똑같은 상황이 되었다.
수용소 내의 사람들은 엄청난 통제와 감시를 받았다. 다카우 수용소는 탈출하려는 수감자들을 사살하는 역할을 했던 감시탑, 너비 2.4미터, 깊이 1.2미터의 개울과 수용소 전체를 둘러싼 높은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몇몇 수용소의 잔인한 생활을 견디지 못한 수감자들은 일부로 감시탑 근처 무인지대 – 3미터 너비의 이 지대는 탈출을 막기 위해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되어있고 이 구역에 들어오게 되는 사람은 즉각 사살당했다. – 로 들어가 ‘자살’을 하기도 했다.
이 곳에서는 생체실험도 자행되었다. 발가벗긴 수감자들을 얼음물에 집어넣거나 추운 날씨에 옷 없이 밖에 묶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생체실험 대상자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 뜨거운 물어 집어넣거나 다른 여수감자들과 강제로 성관계를 맺게 하여 실험대상자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는지 지켜보았다. 이 외에도 많은 끔찍한 실험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수용소 내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45년 4월 연합군이 독일로 진격해오면서 독일은 엄청난 수의 수용자들이 풀려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전선 근처의 수용소의 수감자들을 후방으로 이송시켰고 그 중 한 곳이 다카우였다. 물과 음식을 며칠 동안 먹지 못하는 일이 잦았고 수용소는 수용의 한계치를 이미 한참 넘어버렸다. 극도로 과밀된 수용소와 열악한 공중 위생 환경으로 수용소 내에는 발진티푸스를 비롯한 많은 질병이 야기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비인간적인 환경 아래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1945년 4월 29일 아이젠하워 미육군 장군은 다카우 수용소를 점령하고 약 32,000명의 수감자들이 마침내 풀려났다. 32,000여명의 수감자들은 원래 막사당 최대 250명을 수용하도록 설계된 20개의 막사에 1,600명씩 나뉘어 수감되어 있었다. 또 미군들은 40량의 열차를 찾아냈는데, 각 칸마다 100구 이상의 시체가 가득했다.
이렇게 12년 만에 다카우 강제 수용소는 문을 닫게 된다. 200,000명이 넘는 사람이 이 살아있는 지옥을 경험했고 그 중 1942과 1943년에 나치 친위대 SS 에 의해서 사살된 4,000명의 소련 전쟁포로들을 – 이것은 명백히 제네바 협정 위반이다. – 포함한 35,000명이 이 곳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 역사적 비극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은 물론, 매우 큰 인적 손실도 입었다. 1939년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던 나치 저항투사 게오르그 엘저 Georg Elser 는 1945년 4월 다카우 수용소 안에서 처형당했으며, 신문 ‘올바른 길’ ‘Der gerade Weg’ 을 창간하고 활발한 반나치 활동을 하던 저널리스트 칼 알베르트 프리츠 미하엘 게를리히 Carl Albert Fritz Michael Gerlich 는 1939년 다카우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소개 – 사진으로 보는 다카우>
다카우 강제 수용소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 비석이다. 작년에 직접 방문했었다.
1945년 4월 29일 수용소 해방 직후 미군이 다카우 수용소 정문을 지키고 있다.
수감자들이 자주 지나다녀야 했던 수용소의 요르하우스 Jourhaus 건물의 정문이다. 여기에는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 “Arbeit macht frei.” 라는 슬로건이 쓰여 있다.
1945년에 찍힌 수용소의 모습이다. 저 건물들이 수감자들이 생활했던 막사다.
수용소 장교가 수감자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다.
다카우 수용소 생존자들이 시체를 화장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해방을 기뻐하는 수감자들.
현재 다카우 수용소에 설치된 기념 조형. 정문을 통해 들어가면 바로 눈에 보인다.
기념관에 여러 언어로 적혀져 있는 문구. “Never Again”
나치 친위대 SS 이자 홀로코스트를 계획한 사람들 중 하나인 아돌프 아이만 Adolf Eichmann 이 1961년에 재판을 받고 있다. 전쟁이 종료된 지 20년도 지나기 전에 전범자들에 대한 재판과 처벌이 진행됐다는 점은 우리에게도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찾아가는법>
뮌헨 중앙역 München Hauptbahnhof 에서 S2를 타고 다카우 역 Dachau Bahnhof 에서 내린다. (20분 정도 소요.) 다카우 역에서 KZ-Gedenkstätte 방향 출구로 나오면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Memorial site으로 가는 726번 버스를 타고 7분 정도 이동하면 입구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