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출발, 후 준비

유학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은 오랜 시간 준비하고 결정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정반대의 경우였다. 나의 유학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어찌 보면 즉흥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유학을 가겠다고 결정한지 2달 후에 나는 독일에 도착했고 인생에서 독일어를 처음으로 본 것이 8시간 전 비행기 안 모니터의 ‘해외여행 Tip! 국가별 기초회화 배우기’ 섹션이었으니 말이다. 나의 유학은 정말 그렇게, 독일에서부터 바로 시작했다.

물론 아무 생각이나 이유, 준비 없이 독일로 온 것은 아니었다. 학창시절 미지센터를 알게 되고 프로그램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얻는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에 매료되었던 나는 단순히 책으로 배우기보다 조금 더딜지라도 직접 세상을 체험하며 살고 싶었다. 또 실제로 정치, 복지에 관심이 많았고 정치, 복지제도가 발전된 유럽에서, 보다 가까이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경제적 능력이 하나도 없는 나로서는 부모님께 뻔히 부담이 될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주변에 있는 어학원 중 가장 저렴했던 프랑스 어학원을 – 솔직히 왜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것이 유럽유학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유럽언어는 뭔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 다니며 나중을 준비하는 것이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중 최선이었다. 그렇게 혼자만의 꿈을 꾸고 있던 2013년 겨울에 창원에서 지내시는 아버지께서 오랜만에 서울로 올라오셔서 뜬금없는 제안을 하셨다. 독일로 유학 가보겠냐고.

아버지께서도 사실은 예전부터 내가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활동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시며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를 바라셨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적 상황이 좋지 못해 말을 꺼내시지 못하고 계셨는데 마침 일이 잘 풀려 나에게 제안을 하신 거였다. 부모님의 이혼 이후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게 되면서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평소 하지 못하던 나에게는 정말 뜻밖의 제안이었고 행운이었다.

유럽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했었기에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결정을 내렸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조금 멍청하고 무모했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결정인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밑에서 더욱 자세히 이야기 하겠지만, 사실 독일에 와서 그 결정을 잠시 후회한 적도 있었고 타지살이와 여행은 큰 차이가 있다는 걸 뒤늦게 느끼며 많이 힘들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이것저것 따지며 무작정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독일에서 이 글을 쓰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무지했기에, 용감하게 시작할 수 있었고 무모했기에, 도전 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유럽라이프는 이게 아닌데……

단 한마디의 독일어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약 8400km 떨어진 곳에 혼자 덩그러니 떨어진 후부터 나는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였고 매일매일이 ‘독일에서 살아남기’였다. 한국에선 어려움 없이 했던 수 없이 많은 사소한 것들이 갑자기 벅차게 다가왔다. 제대로 된 식당은커녕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주문하는 것 조차 힘들고 긴장되었다. 주문하는 게 어려워 직접 만들어 먹으려 해도 집에서도 안 해본 장보기와 요리를 심지어 독일에서 하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하루 세끼 챙겨먹고 나면 하루가 끝나있었다. 혼자 살아 본적도 없는데다 심지어 그곳이 타지여서 지금 돌이켜보면 우스울 정도로 간단한 일도 나에겐 어려웠다. 세탁기를 사용하는 법을 모르고 세제를 어디서 사야 하는지도 몰라서 한 동안은 세탁기를 두고도 손빨래를 했으며, 난방비까지 냈으면서 하이충(Heizung, 독일에는 한국처럼 바닥을 덥히는 온돌식 보일러가 아니라 공기를 따뜻하게 만드는 하이충이라고 불리는 난방시설을 사용한다)을 어떻게 작동시키는지 몰라 겨울외투를 꺼내 입고 추위에 떨며 잠을 자기도 했었다. 그렇게 몸으로 독일생활을 배우며 어느 정도 적응이 – 그러니까, 사람처럼 사는 법을 드디어 알게 되었을 때 – 되자 다른 더 큰 어려움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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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도착하고 방을 구하지 못했던 나는 한인교회에 딸린 방에서 지냈었는데, 좀 더 독일문화를 체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독일어도 못하면서 WG(Wohngemeinschaft, 집세부담을 덜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집에 모여서 화장실, 주방을 공유하는 주거형태이자 거주문화이다. 외국인에겐 친구를 사귀고 독일문화와 독일어를 배우는데 최고의 환경이지만 방을 구하기는 현지인들에게도 쉽지 않다.)를 구한다고 한달 가까이 발품을 팔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정말 방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 아무도 독일어가 서툰 동양인이랑 같이 지내려 하지 않았고, 때때론 인종차별적이고 모욕적으로 거절을 당하기도 했다. 아마 그게 내가 당하는 입장으로는 처음으로 경험한 인종차별이었던 것 같다. 미지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활동을 하며 다문화, 인종차별 문제에 누구보다 많이 알고 민감하다고 자부했지만 직접 당하니 정말 기분이 나빴고 어떠한 대응이나 반응은커녕 어떻게 해야 되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한 단어가 그제서야 무엇인지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기분은 안 좋았지만 미지에서 배운 세계시민교육을 되새기며 편견 없는 사람이 되자고 또 한번 다짐할 수 있었다.그렇게 한달 내내 WG를 알아보며 WG에 관해서는 반 전문가가 될 즈음, 겨우 마음에 드는 방을 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은 내가 더 배우길 바라셨는지, 또 한번 시련을 주셨다. 계약서 조항을 잘 읽어보지 않은 탓에 – 사실 계약서를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 당시 내 독어 실력으론 턱없이 부족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보증금은 당연히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 되돌려 받게 되는데, 보증금 상환 기간에 너무나 길게 정해져 있었다. 독일에 계속 지낸다면 큰 상관이 없겠지만 방을 빼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나에겐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그 집주인은 외국인의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서 보증금을 꿀꺽하려는 의도가 있었고 여태까지 그렇게 돌려주지 않은 외국인의 보증금이 꽤 되었다. (사실 외국인들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경우는 상당히 많다. 보증금이 우리나라처럼 비싸지 않고 보통 월세의 2~3배 정도이기 때문에 해외에서 돈은 송금 받거나 혹은 받지 못해서 소송을 걸기 힘들다. 이 점을 잘 아는 몇몇 집주인들은 정해진 기간 안에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의도적 늑장을 부린다.) 그래서 계약서의 조항을 바꾸기 위해 독일 법도 들여다보고 이메일과 편지뿐만 아니라 사무실도 찾아가며 또 몇 주간은 고생을 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조항은 바꾸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한국을 가기 위해 방을 뺐을 때엔 우려했던 일도 벌어졌다. 그래도 그렇게 한 덕분인지 보증금의 반은 돌려받았고 나머지도 곧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반년째 소식이 없어 지금은 마음을 비운 상태다.

그렇지만 사실 별로 개의치 않는다. 여러 순탄치 않은 사건들 덕분에 그 이후 독일어가 눈에 띄게 늘었기 때문이다. 독일어 시험을 보면 점수는 별로 좋지 않을 수 있어도, 적어도 WG에 관해서는 모르는 말이 없었고 혼자서 계약서 정도는 가뿐히 쓸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작년 겨울에 유럽여행을 하는 한달 동안 츠비센미터(Zwischen Mieter, 집을 장기간 비우게 되면 그 동안 집을 다시 세놓기도 한다. 세입자의 세입자인 셈. 대부분은 츠미센미터가 합법이지만 계약서에 따라 허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를 구해 집세를 아꼈는데, 그 때 한달 간 머무르던 사람과의 계약서는 내가 직접 썼다. 또 집주인이랑 하도 입씨름을 한 탓에 독일어가 많이 늘어서 내 의사를 전하는 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졌다. 기죽어 있었던 자신감도 되살아났고 비록 완벽하진 않지만 겁내지 않고 말하다 보니 친구들도 많이 생겼다. 이사를 한 후부터 생활이 정말 많이 바뀌었다. 자신감이 갖게 되니 한결 여유로워졌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멀고도 험한, 독일에서 ‘학생’되기

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는 것이 목표이다. 모든 나라가 그렇듯이 고등교육을 넘어선 대학교육은 쉽지 않다. 공부하는 것도 물론 어렵지만 그전에 입학하기도 만만치 않다. 일부 사설대학교를 제외하곤 학비가 없는 독일의 대학교는 평준화되어 있기 때문에 대학진학률이 80%에 달하는 우리나라보다 경쟁은 덜하지만 입학여부만을 나누는 자격조건이 높아 들어가기 더 쉽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또 영어로도 이수가 가능한 석사, 박사와 달리 대부분의 학사학위는 독일어로 전공해야 하는 탓에 외국인에게는 대학수업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 당연히 – 요구된다.

외국인이 독일정규대학교에 입학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DSH(Deutsche Sprachprüfung für den Hochschulzugang, 독일어공인인증시험)의 기준 점수를 통과하고 대학에 바로 입학하거나 스튜디언 콜렉(Studien Kolleg, 외국인을 위한 예비대학교와 비슷한 곳으로 대학교에서 조건부 합격증을 받은 후 입학시험을 통과하면 입학할 수 있다. 보통 2학기를 이수하고 대입시험을 본다. DSH 성적을 가지고 입학하는 것보단 시간이 더 걸려 돌아가는 느낌이 있지만 두 학기 간 대학에서 전공할 과목을 쉽게 미리 배우기 때문에 일부로 스튜디언 콜렉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다.)을 이수하고 치룬 시험성적으로 입학한다. 그러나 두 가지 방법에 공통으로 필요한 자격조건이 있다. 모국의 고등학교와 대학입학시험 성적이다. – 성적반영방식과 비율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자세한 정보는 www.anabin.kmk.org 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 조금은 이상하게도 내가 지원하려는 학과는 고등학교의 과학성적도 반영했는데 문과였던 나는 과학성적 자체가 없었다. 또 수능을 볼 때만해도 독일로 유학가게 될 것이라 꿈도 꾸지 못했던 나는 제2외국어를 포함한 모든 과목을 응시했는데 그 때문에 평균성적이 낮아져 기준성적에 약간 모자라게 되었다. DSH 점수가 있다 해도 바로 대학에 입학은 불가능했고 스튜디언 콜렉 지원도 사실상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사소한 문제들을 넘어서서 정말 실질적인 문제가 닥친 것이다.

이 때가 독일에 온지 10개월쯤 된 시점이었는데 사실 나는 내 유학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많이 슬프지도 않았다. WG 문제를 비롯해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잘 해결된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신이 한번 더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태까지 배운 것도 있고 마무리를 멋지게 하고 싶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후회 없이 가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나는 독일에 있는 거의 모든 대학교에 지원서를 넣었다. 성적이 기준에 못 미치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자기소개서를 열심히 쓰는 수 밖에 없었다. 한달 내내 – 시간은 많았다. – 쓰고 또 쓰고 선생님, 친구들 가리지 않고 조언과 첨삭을 받았다. 이전까지의 어려움들이 독일어의 말하기를 향상시켰다면 이번엔 쓰기였다. 정말 지겹도록 독일어만 썼다 지웠던 것 같다.

결과는 예상되다시피 거의 다 불합격이었다. 불합격 통지 편지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을 때, 마음을 완전히 접고 한국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다른 편지들보다 많이 뒤늦게 하나의 편지가 도착했다. 너무 많은 대학에 지원서를 넣다 보니 답신이 아직 오지 않은 대학이 어딘지도 잊어버렸을 즈음이었다. 우편함 확인을 안하고 있던 나에게 같이 사는 친구가 전해준 그 편지는 정말 놀랍게도, 합격통지서였다. 내가 일부러 괜히 극적으로 글을 쓴 것처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정말 상황이 그랬다. 적어도 나에겐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독일 전역의 대학교 중 딱 한군데에서만 합격통지를, 그것도 제일 마지막으로 받았으니 말이다. 고3때 입학사정관제에 모든 수시전형을 올-인했다가 올-아웃 당한 적이 있었던 나에게 그 합격증의 의미는 더욱 컸다. – 무엇인가로부터 합격된 것이 만 2년 만에 처음이었다. – 사실 그 편지는 합격증이라기보단 초대장에 가까웠는데, 그 편지를 받아야 스튜디언 콜렉의 입학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겐 큰 상관없었다. 또 하나의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고 충분히 시험을 잘 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지금 튀링겐 주 노르트하우젠에 위치한 스튜디언 콜렉에 재학 중이다. 운이었는지, 자신감 덕분이었는지 올해 9월 나는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1년간의 좌충우돌 유학준비과정이 일단락되고 드디어 진짜 유학이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말 사소한 것부터 쉽게 풀리지 않았던 나의 독일 스토리는 – 유학준비라 쓰고 생존과 기적적 운의 연속이라 읽는다. –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학입학도 멀었고, 아니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확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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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1년 동안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할 수 있을 때 일단 도전하라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바로 시작해라. 만약 내가 출발 전에 이리저리 재고 계산했다면 내 성적이 기준에 못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아마 유학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또 안될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모든 대학교에 지원하지 않았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여태까지의 타지생활은 쉽지 않았다. 앞으로도 아마 그리 순탄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어떤 이에겐 별것도 아닐 수 있는 스튜디언 콜렉에 입학하기까지의 이 과정이 나는 매우 재미있었다. 정말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다시는 할 수 없을 수 많은 경험들도 쌓았다. 그렇기에, 나는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계속 목표를 향해 즐겁게 도전할 생각이다.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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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loria “Chae Eun” Park

    안녕하세요^^ 저도 이번 9월부터 Nordhausen 콜렉에 다니고 있습니다. 글을 읽으니 너무 재미있고 신기하네요. 혹시 아직도 콜렉에 계신가요?

  • Jiyeon Koo

    흥미진진! 완전 몰입해서 읽었어요-! 이후의 독일 생활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